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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야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경제 성장

by 하얀스케치북선물 2023. 5. 24.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 경제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이런 아픔을 딛고 지금은 전세계에 한국을 많이 알릴정도로 어마어마한 발전을 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이유와 발전과정을 이해하면 거시경제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날이다. 이때 해방이 된 이유가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이 6년이나 이어지면서 일본이 항복을 하고 2차 세계대전도 종식하면서 대한민국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게 된다.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이 주둔을 하면서 그동안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적절한 절차를 거쳐 완전 독립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주둔이다 보니 두 정치적인 이념이 대립되면서 6.25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

 

전쟁이 끝나고나서는 남한과 북한 모두 초토화 된 상황이었다. 이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놓고 간 각종 공장과 상점 이런것들을 처분해야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도로와 철도 등을 개통하고 부서진 건물과 집을 지어야만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두고 간 공장들을 살펴보니 남북 간에 차이가 있었다. 북한은 광물 자원이 풍부하다보니 비료, 시멘트, 화학공장, 화력발전소, 수력발전소들이 모두 북한에 있었다. 남한에는 농지만 많고 공장이라고는 미신공장, 식품공장 이런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6.25전쟁 이후에는 남한보다는 북한이 더 잘 살았다. 

 

1950년대는 원조경제

1950년대는 원조경제이다. 남한 즉, 대한민국의 사정은 북한보다 좋지 않았다. 북한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써야 될 정도였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서방국가들에게 경제 원조를 받아야 했다. 미국은 한국에 각종 면화 밀 설탕의 원료인 원당 등 다양한 농산물을 제공해주었다. 한국은 이 농산물을 원조 받아서 바로 국민들에게 배급을 해주지 않고 공장들에게 조금 싸게 넘겨서 이 원조 물품을 다시 생산을 해서 판매를 하도록 했다. 이렇게 생산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면화를 받아서 옷을 만들어 팔았고, 밀을 받아서 밀가루를 만들어 팔고, 원당을 받아서 설탕을 만들어 팔았다. 여기서 세가지 산업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하얀색이라는 것이다. 그 유명한 300산업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탄생이 되었다. 이때 설탕을 파던 기업이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이다. 삼성그룹이 제조업의 첫 발을 내딛은 회사이다. 

 

1960년대는 수출경제

1960년대는 수출경제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이 공짜로 원조 물자를 주지 않았고 돈을 받았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은 위기가 왔다. 이제는 필요한 물품들을 해외에서 수입해서 사와야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수입을 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고, 1960년대 한국은 달러 확보를 하기 위해 수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라는 전략의 계획이었다. 이 전략은 일단 필요한 돈을 해외 선진국에서 빌려오고, 이 돈을 경제 성장의 파급 효과가 높은 산업 분야에 먼저 투자를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가발, 섬유, 신발 같은 경공업 제품이었다. 경공업 제품은 고도의 기술보다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 당시에는 임금이 낮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그래서 가발, 신발, 섬유 쪽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했고, 수출 효자상품들이 되었다. 그리고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들에게는 보상도 확실하게 해주었다. 세금혜택도 주고, 기업이 돈이 필요하면 우선적으로 빌려주는 등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 1964년에는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기도 한다.

 

이후부터는 매년마다 수출이 40%씩 증가하면서 1967년에는 수출이 3억5천만 달러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1차 경제계발계획이 크게 성공하면서 2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 3차, 4차, 5차까지 체계적으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1차에서 4차에 걸친 기간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이 무려 8.9%를 넘는 고도 성장을 기록했다. 

 

견공업 수출로 인한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독일로 파견을 갔던 광부와 간호사들의 외화벌이 또한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의 임금은 너무 적었다. 독일로 파견을 가면 한국에서의 월급보다 10배를 더 받을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파견을 많이 갔고, 타국에서 힘들게 벌어드린 외화를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면서 한국의 외화벌이에 큰 보탬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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