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제 이야기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다진 1970년대 중화학공업

by 하얀스케치북선물 2023. 5. 25.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이 필요했던 이유

1950년대에는 원조경제, 1960년대에는 수출경제였다면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경제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에는 전쟁 후 미국에게 원조를 받은 물품들은 재가공하여 팔아 살아났다면, 1960년대에는 단순 노동력이 중요한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경제가 커졌다. 그런데 60년대 후반부터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한국보다 훨씬 더 낮은 인건비로 똑같이 경공업에 뛰어들면서 한국 제품보다 더 싸게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수출 경쟁력이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런 단순 노동으로 인한 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라고 판단을 하고 다른 산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북한이 자꾸 남한을 도발한다. 간첩을 보내기도 하고 군사분계선에 위치한 한국 군인을 습격하기도 하고 대한항공 항공기를 북한 간첩이 납치를 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도 조금씩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군사력을 위한 방위산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방위산업을 수출과 잘 연계를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중화학공업이었다. 현재의 반도체, 조선 산업의 기틀을 만든 그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다진 중화학공업

중화학공업은 철강, 기계, 전자, 자동차, 조선 등을 말한다. 이 산업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 산업이면서도 전쟁이 나면 바로 방위산업으로 전환하기에 유리했기에, 부가가치가 있는 산업 육성과 군사력을 함께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자동차산업

하지만 이 당시에 한국은 자동차, 조선, 전자 산업 등에 기초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있었던 자동차 산업도 외국 차를 그냥 수입해서 단순히 조립만 하는 수준이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로 한 이상 더 이상은 외국에 의존할 수 없다 라고 판단했고, 자동차 국산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로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탄생했다. 포니를 계기로 현대자동차는 자신감이 붙었고 계속해서 기술을 쌓아가게 된다.

조선업

조선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지형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수출과 수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조선업을 발전시키면 엄청난 시너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런 기술력이 없었다. 이때 조선업에 뛰어 든 사람이 현대건설의 정주영회장이었다. 정주영회장은 영국의 수출입 은행에 가서 돈을 빌렸다. 2년6개월 안에 대형 선박 수주 계약을 따내는 조건이었고, 실패하면 빌려준 돈보다 더 많이 갚아야 했다. 정주영회장은 결국 기한 내에 조선소와 배를 완성시켰고, 이것을 발판으로 현재까지 한국의 조선업계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산업이 되었다. 

반도체

1970년대에는 반도체 또한 기술력이 전혀 없었다. 이 당시 미국과 일본은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만들고 있었고, 한국은 tv,라디오 이런 것을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정부에서는 기술력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교육도 시키고 작은 부품부터 시작해서 국산화를 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단순 조립이 아니라 점점 전자기기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건설업

그리고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 건설 현장에 투입되어 베트남의 철도, 항구와 같은 인프라를 짓기 시작했다. 베트남 역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시설들이 망가져 있었고, 한국이 베트남 건설 현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임금은 한국 월급의 무려 15배였다. 베트남에서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지만 건설 현장에 투입된 한국인들은 완벽하게 일을 해냈다. 베트남에서의 성과가 소문이 퍼지면서 태국, 일본, 중동까지 한국에 건설 공사를 요청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외 건설업의 특수로 한국 경제 발전에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의 초석은 현재까지도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댓글